<조상 숭배의 나무, 밤나무>-최진태의 식물 오디세이 (21)

얼마 전이 팔월 한가위 추석이었다. 시골에 있는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길에 밤나무를 보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나무 밑둥치를 발로 툭툭 차고 후두둑 떨어지는 알밤을 주우면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이 정겹다. 차례 상에 반드시 올리는 과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밤이다. 낙랑 고분이나 가야 고분에서도 밤 껍질이 출토 될 정도로 밤과 우리민족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식량 자원이라는 중요성과 유교 이념의 영향을 받은 조상 숭배 사상이 밤 애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밤은 자신의 근본은 물론 조상을 섬기고 효를 행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밤의 발아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밤이 싹틀 때 껍질은 땅 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 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이런 밤의 특성 때문에 자기를 낳아 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나무로 보았다. 충과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숭배한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나무이다. 이러한 조상 숭배의 상징을 가졌으니 조상의 위패와 제기의 재료로도 귀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 결혼의 예를 치른 신부가 시부모님께 첫 인사를 올릴 때도 밤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밤이 이런 예물로 쓰이는 것은 밤이 상징하는 조상 숭배와 가문 보전 때문이다. 밤이 싹이 트고 자라도 그 껍질이 썩지 않고 계속 붙어 있는 것처럼 시부모와 조상을 잊지 말고 잘 모시라는 의미이다. 시부모는 며느리가 올리는 폐백과 절을 받고는 올라온 밤을 조상 잘 모시라는 뜻으로 다시 며느리에게 던져 줌으로써 이를 수락한다. 물론 득남을 기원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풍속이 그대로 남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서거정의 ‘시가집’ 에는 밤나무 숲을 노래하면서 ‘밤꽃이 눈처럼 피었고 향기가 진동하니’ 라고 했다. 그러나 유월경에 피는 밤꽃은 결코 향기롭지마는 않다. 옛 부녀자들은 이 밤꽃 향기를 양향(陽香)이라고 하여 이 냄새를 부끄러워하여 밤꽃이 필 때는 외출을 자제했다는 얘기도 전해오는걸로 봐서 유월의 밤나무에는 섹슈얼리티가 흐른다 할 것이다. 밤나무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교훈을 담고 있는데 그 중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이라는 뜻이다.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이라는 말과 실질적 내용이 조금도 다르지 않는데도 그로 인해 기뻐하고 성내는 것의 어리석음을 가르치는 말이다. 유럽의 밤나무는 존경과 친밀감을 상징한다. 괴테나 하이네는 남성의 사랑에 비유했고 두보는 농가의 풍년을 표현했다. 서양에서는 신성한 음식으로 여겨 성시몬의 날, 성 마르틴의 날, 만성절 날 식탁 위에 올려졌다. 밤나무는 목재로도 많이 이용 된다. 세계 각국의 철도 침목은 거의 밤나무라고 한다. 재질이 단단하고 탄성이 커서 승차감이 좋다. 목재의 탄닌 성분 덕택에 잘 썩지도 않는다. 또 포도주를 보전하는 통으로 오크 즉 참나무통이 유명하지만 밤나무 목재에는 액체의 흐름을 막아주는 조직이 발달해 있어 밤나무 술통도 많이 쓰인다. 영국의 유명한 웨스트 민스트 사원 역시 밤나무 목재로 지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에는 하혈 또는 토혈하는 이들은 밤 껍질을 태워 복용하고 설사가 나면 구운 밤 삼십 개를 먹으면 되며, 허리와 다리에 힘이 없으면 매일 생밤 열 개씩 먹으라고 되어 있다. 밤을 넣어 만드는 요리도 약밥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을 정도로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충효의 개념이 점차 시들해져 가고 있는 요즘 세태를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밤나무와 그 열매인 밤이 주는 의미를 이 가을날 한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험하디 험한 산기슭에/ 서 있는 그 이유일랑/ 고난과 시련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등불 밝히려는 것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알게 함인 것을/ 저 날카롭고 날카로운 가시 면류관/ 뒤집어 쓴 채/ 알알이 익어가는/ 영롱한 진주/ 그대 소망의 열매 때문인 것을” (필자의 졸시 ‘밤나무’)

-2016. 9. 21. 水. 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