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에 접어들었는데도 예전보다 푸근한 날씨다. 그래서인지 온갖 맵시와 화사함을 자랑하던 뭇꽃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 즈음인데도 산과 들에 나가보면 아직도 하늘거리는 꽃봉오리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꽃이 바로 들국화이다. 국화는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늦가을에 피어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므로 은둔하는 선비로 비유되어 지조, 절개, 정조 그리고 길조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 강인함과 고매함을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하며 문인들과 양반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재배기술의 발달로 일 년 중 언제라도 국화를 볼 수 있지만, 봄여름 가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도 묵묵히 참고만 있다가 다른 꽃들이 모두 시든 다음, 맨 마지막에 홀로 고고히 피는 국화는 세속에 잡된 것을 멀리하는 군자에 비유되었다. 또한 그윽한 향기와 더불어 약효가 뛰어나 불로장생의 신령한 초본으로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청자에 이미 국화문양이 등장하고 있다. 한옥의 여닫이 창문의 손잡이 부근에도 국화의 꽃이나 잎으로 장식했다. 국화는 원예학 상으로 지구상의 식물 가운데 가장 진화된, 영리한 식물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국화 전시장의 원예 종들은 더할 수 없이 기묘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약간은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은 떨치기 어렵다. 들과 산에는 수많은 들국화가 피어난다. 들국화란 한 품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국화과의 여러 꽃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감국, 산국, 구절초, 쑥부쟁이, 참취, 해국, 개망초, 울릉국화 등을 들 수 있다. 동전 크기보다 작은 감국, 산국은 앙증스럽기까지 하다. 아홉 번 죽었다 아홉 번 피어나도 첫 모습 그대로 피어난다는 구절초는 들국화 가운데 가장 꽃이 크고 화려하다. 쑥부쟁이는 꽃이 연보라색인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무리지어 피어난다. 참취는 봄에 나물로 먹는 바로 그것인데 작고 하얀 꽃이 아름답다. 국화는 원산지인 중국에서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고 현재까지 세계 절화 생산량 1위로 수천종 이상의 품종 수를 가진 꽃이 되었다. 국화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꽃이다. 세련, 섬세, 화려, 우아, 고결의 미를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겸양의 미덕을 간직해 야단스럽지 않다. 이제 국화는 전 세계적인 꽃이 되어 군자의 마음을 전 세계에 전하고 있다. 일본의 국기인 욱일기(旭日旗)에는 일출의 모양을 그린 것이 아니라 둥그런 꽃술 다발 주위에 열여섯장의 꽃잎을 가진 국화를 그리고 있다. 서양에서는 평화. 풍요. 부. 거룩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국화를 장례식 때 사용하는 이유는 망자에 대한 평화로운 휴식을 기원하는데 에서 연유한다. 날은 어두워지고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럴수록 아직도 더욱 짙어지는 들국화의 향기는 멀리 있어도 더욱 그리워 지는 사람의 향기를 생각케 한다. 따끈한 국화차 한 잔, 국화주 향기 속에 떠오르는 누군가는 마냥 아련하기만 하다. 떠나보내는 자의 애상일까? 우리의 삶도 스치고 떠나는 이들의 향기를 닮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야생 들국화의 성정 닮은 쩡쩡한 목소리 울리며 굽힐 줄 모르는 올곧은 성품과 지조와 결기 가득 넘치는 문인지사, 정객들이 유난히도 더 기다려지는 세월의 한 모퉁이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중국의 도연명은 ‘음주(飮酒)’ 라는 시에서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 이라고 읊고 있다. ‘동녘 울타리 밑에 국화꽃을 따든 채 남산을 조용히 바라본다’ 란 뜻이다. 고담(古談)한 선비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내 목숨 다하는 그 날/ 그럴듯한/ 몇 줄의 시가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은,/ 시가 술술 써질 듯한/ 찬 서리 내린 날/ 해풍에 떠밀려 올라선/ 연대섬 언덕엔/ 산 속의 무리가 떼 지어서/ 행을 바꿔가며/ 황금빛 연작시를/ 줄줄이 풀어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