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의 다섯가지 층 – 판차코샤(Ⅲ)>
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읽기(99)
우리 몸의 다섯가지 층 중에서 가장 바깥쪽에 속하는 것이 식량층 또는 육체층이라고 한다. 음식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함으로써 생명에너지를 공급받는 층인 것이다. 몸은 먹은 대로 된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던 브리야사바랭의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삶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먹고 또 먹는 삶이다. 하루 종일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새가 하는 일은 오로지 먹을 것을 찾는 일,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는 일이 밥 먹는 일이다. 삶의 가장 큰 감동은 살아있다는 그 자체다. 인생을 한껏 살아간다는 것은 장관이나 대부호가 되는 것도 아니고 행복만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기쁠 때도 있지만 고독하게 우는 날도 있고 성공의 희열을 느낄 때도, 절망하는 날도 반드시 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은 생명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먹어야 산다” 이 짧은 문장보다 강력한 말이 또 있을까. 만 생명이 먹어야 목숨을 부지한다는 점에서 진리다. 사람도 먹어야 산다. 인간 역시 생물의 한 종(種)이기 때문이다. “때를 거르지 말라”, 흔히 멀리 있는 자식에게 부모들이 당부하는 말이다. 끼니를 거르지 말라는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 제때 밥을 먹어야 몸의 순환과 기운을 잃지 않는다. 그래야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다. 잘한다는 것은 집중한다는 뜻이다. 몸의 에너지가 잘 돌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말과 행동이 부드러워진다.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린다고 느껴질 때야말로 몸과 마음이 가장 편안한 상태가 아닌가. 불가의 경전에서도 아침, 저녁 먹어야 할 음식이 다르고, 계절과 절기마다 먹어야 할 음식이 따로 있으며, 몸의 상태에 따라 음식을 조절하라고 가르친다. 몸의 울림은 심장에서 시작되고, 몸의 움직임은 머리에서 시작 된다는 게 인체에 대한 의학적 기본 지식이다. 예전부터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할 정도로 밥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제 밥그릇은 제가 지니고 다닌다”, “남의 밥을 먹어 봐야 부모 은덕을 안다”, “눈물 어린 밥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의 참 맛을 알 수 없다” 등의 속담은 한국인의 삶이 얼마나 밥과 긴밀히 연결됐는지 알려주는 방증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말도 시사하는 바가 크며, “쌀독에서 인심난다” 는 속담도 서로 나눠 먹는 삶, 더불어 살아감을 강조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은 식구(食口), 즉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솥밥 먹고 자랐다.”는 말도 있듯이 밥은 사람의 일생에 깊이 관여한다. 또한 귀하고 소중한 인연들과 결별하고 그 절망과 슬픔으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잔인한 고통에 짓이겨 질 때, 도저히 참기 힘든 결핍과 상실의 무게에 온통 머리가 하얗게 바래지고 맥없이 철퍼덕 주저앉아 버리는, 이렇듯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서도 피눈물 흘리며 꾸역꾸역 밥숟가락을 입에 떠 넣어야 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가련함이다. 그러나 나 챙겨 먹자고 그런 것만 아니니 우선 우리 몸 맨 바깥층에 있는 식량층에 영양을 공급해야 생기층이 살아나고 몸의 그 안쪽 마음층, 이성층을 통해 추모하고 애도하는 숭고한 마음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 모두 밥심에서 발원된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으로 태어난 본태적 숙명이며 가장 인간다움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네가 주인이라서 섬기며 살아 왔다 / 네가 목숨이라서 가꾸며 살아왔다 / 그 세월 지난 듯도 한데 왜 아직도 배고프니?”. 이우걸 시인의 ‘밥’이란 시다. 밥을 먹는다는 것,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의식임을 오늘도 밥상 앞에 앉아 목하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닌다는 것이니라. 하루 세끼 밥을 먹는다는 것은 우주와 더불어 사는 것 이라” 는 밥님의 설교 듣고 있다.
2016.5.4.水
운형